[젠더브리프/소식] 삶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 : 랄리푸르에서 마주한 네팔 여성들

2025-12-22


삶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 랄리푸르에서 마주한 네팔 여성들 


서가희 (아시아위민브릿지 두런두런 KOICA YP)1)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내가 네팔 여성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두런두런에서 KOICA DAK 사업 실무를 맡으면서 “네팔 카트만두 밸리 여성 사회·경제적 역량강화 사업”의 보고서와 지표 속 숫자들을 보긴 했지만-그곳의 삶은 여전히 머릿속 어딘가 먼 풍경에 가깝게 느껴졌다. 내게 “네팔 여성”은 생소하고도 낯선 존재들이었다.

그런 내가 지난 11월, 네팔 랄리푸르(Lalitpur)에 직접 서 있었다. 11월 14일, AWBN Networking Event 2025 행사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서류 속에만 존재하던 네팔 여성들의 얼굴과 이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입구에서 참가자 명단을 확인하며 “나마스테” 하고 인사를 건네는 AWBN 스태프들의 표정, 아직은 긴장했지만 정성스럽게 진열대에 빵을 옮겨 담던 훈련생의 손, 그리고 마이크를 잡고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또렷하게 울려 퍼지던 네팔어 목소리. 그 장면들 속에서 “사업”이라는 단어는 어느새 사라지고 오직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만이 남았다.


 AWBN Networking Event 2025에 참석한 두런두런 임직원들과 AWBN 퍼실리테이터 슈슈마와 함께


행사장에는 훈련을 막 수료한 참가자부터 취·창업 단계에 있는 여성들, 그리고 지역에서 함께 협력하는 이해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누군가는 제과 기술을 배우고, 누군가는 디자인 기술을 배우며, 또 다른 이는 작은 카페 창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보고서 속에서 익숙하게 보아 온 “수료생 ○○명, 취·창업 연결 ○○건” 같은 문장은 이 자리에서 비로소 생생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저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로는 제가 뭘 좋아하는지도 잘 몰랐어요. 그런데 훈련을 받으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어요.”

한 참가자의 말을 통역을 통해 들으며, 그동안 봐왔던 보고서 문장 하나하나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나는 스스로 조금 부끄러워졌다. 우리는 종종 “역량 강화”, “경제적 자립” 같은 단어들을 너무 쉽게 쓰곤 한다. 하지만 그 말 뒤에는 정말로 어떤 여성의 삶 기반을 다시 세우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새삼 실감했다. 네트워킹 행사 중 제대로 들어본 네팔어는 생각보다 훨씬 힘 있고 당찬 언어였다. 행사 내내 들려오는 네팔어에서 살아있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네트워킹 행사를 위해 최종 점검을 하는 AWBN 일원인 얼빠나와 수료생들


네팔어 속담 중 인상 깊었던 말이 하나 있다. 

“삶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 

네팔에 오기 전까지 솔직히 네팔 여성들의 삶을 충분히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가부장적 통념과 조혼, 교육 기회의 제약, 고된 노동 환경 같은 키워드들이 머릿속에 ‘상식’처럼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각자가 어떻게 삶을 이어가고, 또 서로 마주보며 웃기도 하며, 서로를 지지하며 살아가는지는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시골로 내려가면, 많은 네팔 여성들이 10대 때부터 노동을 시작한다고 한다. 가족의 소득을 돕기 위해, 학교 대신 일을 택해야 했던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집 안팎에서 누구보다 오래 일을 하지만, 그 노동은 종종 ‘당연한 일’로 간주되며 존중 받지 못한다. “집안일은 원래 여자 일이니까”, “여자는 남편을 따라야 하니까”라는 말이 깊게 뿌리내린 사회에서, 여성의 노동과 목소리는 가장 늦게 인정받는다.

AWBN과 두런두런이 함께하고 있는 이 사업은, 그 틈을 조금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여성들의 노동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라고 느껴졌다. 단순히 기술 훈련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여성들이 자기 이름으로 은행 계좌를 만들고, 자기 힘으로 소득을 벌며, 동료들과 함께 작은 네트워크를 쌓아가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권리 회복”처럼 다가왔다.

 


네트워킹 행사 중간 중간 참가자 몇 명이 앞으로 나와 자신이 만든 빵과 디저트를 자리에 가져가 주었다. 조심스럽게 쟁반을 들고 나와 떨리는 목소리로 옮겨 줬던 교육생들의 눈빛에서 반짝임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AWBN 교육생들 이 무대 앞에 나와 수료증을 받던 순간들을 생생히 떠오른다. 그들의 들뜬 마음과 설레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내가 한국에서 여러 번 써왔던 ‘여성의 사회·경제적 역량 강화’라는 문구가 처음으로 피부로 와 닿았다.


이미경 이사(두런두런 자문위원)가 AWBN 네팔 여성 수료생에게 

환영과 축복의 의미를 담은 카타(Khata)를 건네고 있다.


이번 네팔 출장은 AWBN을 모니터링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지만 나 스스로에게는 개발협력이라는 일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다시 되묻는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는 때때로 현장을 프로젝트의 무대로만 바라보는 오류를 범할 때가 있다. 시작 시점과 종료 시점이 명확하고 목표와 지표가 정해져 있으며 예산과 결과보고서가 따라오는 하나의 사업 단위로만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랄리푸르의 행사장에서 만난 여성들에게 이 사업은 ‘3개년 프로젝트’가 아니라, ‘내 삶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는 기회’에 가까웠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몇 가지 질문을 계속 떠올렸다. 


우리는 파트너 단체의 목소리를 얼마나 충분히 듣고 있는가? 현지 여성들의 욕구와 우선순위를 우리 사업의 언어로만 번역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성공한 사업’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누구의 목소리를 앞세우고 있는가? 


AWBN 스태프들은 행사 준비 내내 분주히 뛰어다니면서도, 참가자 한 명 한 명에게 말을 걸고 손을 잡고 포옹을 건네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연대’라는 단어가 꼭 거창한 캠페인이나 문서 속 선언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의 첫 발표를 함께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봐 주는 것, 가정 내 갈등 때문에 교육을 중단할까 망설이는 참가자에게 다시 한 번 와 보자고 손을 내미는 것, 그런 작은 행동들이 쌓여 지금의 AWBN 내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AWBN 여성 네트워킹 행사 중 ‘에드보커시 리더쉽 강연’


네팔에서 돌아온 뒤, 사무실에 앉아 다시 사업보고서를 정리하다 보니 순간순간 네팔의 공기가 떠올랐다. 직접 구워온 빵 냄새, 네팔어로 오가는 활기찬 리더십 강의들, 서로 주고받는 웃음들, 그런 기억들이 책상 위에 놓인 숫자들에 조금 다른 무게를 부여한다. 그리고 내게도 작은 책임감을 남긴다.

 

“나는 이 숫자들 뒤에 있는 얼굴들을 한 번은 직접 본 사람이다.” 


그 사실이 나로 하여금 보고서의 한 줄을 쓰더라도 조금 더 신중을 기하게 된다. 삶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는 네팔 속담처럼 현장은 언제나 삶이 먼저인 곳이다. 그 삶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정책과 사업을 설계하고 파트너와 함께 걸어가려는 시도가 진짜 의미 있는 개발협력일 것이다. 이번 네팔에서의 경험은 두런두런의 YP로서 내가 앞으로 어떤 질문을 품고 어떤 태도로 현장을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하나의 기준을 세워 주었다. 

언젠가 다시 네팔을 찾게 된다면 그때는 이번 네트워킹 행사에 참여했던 여성들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그 이후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리고 그들의 변화가 ‘성과지표 달성’이라는 말로만 요약되지 않고 각자의 이름과 삶으로 계속 이어지기를 한국에서 조용히 응원하고 싶다. 









[각주]

1) 서가희는 아시아위민브릿지 두런두런에서 2025 상반기 YP로서 8월부터 두런두런과 함께하고 있다. ‘네팔 취약계층 여성 역량강화 사업’과 ‘DAK 정책협력사업’을 중심으로 실무 보조 및 지원을 맡았다. 사업 운영과 홍보 업무 등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며, 국제개발협력 현장에서 젠더 관점이 실제 사업에 어떻게 반영되는지에 관심을 두고 있다. 특히 이주여성과 교차적 취약성에 주목하며, 현장과 정책을 잇는 젠더 관점의 실천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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